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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설날 풍경, 그때는 이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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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다가오면 고속도로는 막히고 기차표는 매진된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세배를 드리고 떡국을 먹는 풍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설날은 지금과 닮은 듯 많이 달랐다. 지금처럼 귀성길 걱정은 없었지만,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더 촘촘하고 복잡한 의례와 공동체 문화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설날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냈을까.

설날의 이름, 원일과 정조

조선시대에는 설날을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라고 불렀다. 원일은 한 해의 첫날이라는 뜻이고, 정조는 바른 아침이라는 의미다. 지금 우리가 쓰는 '설날'이라는 말은 '새해 첫날'을 뜻하는 순우리말에서 비롯됐으며,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주로 한자 표기가 쓰였다. 설날은 조선시대 최대 명절이었다. 정조(正朝), 단오, 추석, 한식을 4대 명절이라 불렀는데, 그중에서도 정조는 왕실과 민간 모두에서 가장 성대하게 치르는 날이었다.

궁궐의 설날, 왕과 신하의 하례

새해 첫날 궁궐에서는 대규모 의례가 펼쳐졌다. 정조하례(正朝賀禮)라 불리는 이 의식에서 신하들은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올렸다.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인정전 같은 정전(正殿)에서 백관이 도열해 임금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중국 황제에게도 사신을 보내 새해 축하 서신을 전하는 것이 외교 관례였다.

왕비와 후궁들은 왕에게, 왕세자 이하 왕족은 왕과 왕비에게 별도로 하례를 올렸다. 이날 임금은 신하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죄인을 사면하는 사유(赦宥)를 내리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설날에 임금이 직접 활쏘기를 하거나 격구를 즐기는 기록도 남아 있다. 1425년(세종 7년) 실록에는 세종이 설날 아침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 시범을 보였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차례와 성묘, 조상에 대한 예의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 설날 아침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차례였다. 차례는 제사와 달리 간소화된 의례로, 주로 낮에 밥과 국 대신 떡국을 올리고 조상에게 새해 첫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제사에는 메(밥)를 올리지만 차례에는 설에는 떡국, 추석에는 송편을 올리는 것이 원칙이다. 조선 중기 이후 주자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가례(家禮)에 따른 차례 형식이 엄격하게 규범화됐다.

차례가 끝나면 성묘를 했다. 멀리 있는 조상의 산소를 직접 찾아가 절을 올리고 묘역을 정비하는 것이다. 한겨울 혹한에도 성묘는 효도의 표현이자 가문의 의무였다. 조선시대 효도 관련 규범서인 소학(小學)에는 설날 성묘를 통해 자손이 뿌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세배와 세뱃돈, 지금과 얼마나 달랐나

세배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큰절을 올리고, 어른들은 덕담을 건넸다. 덕담의 내용도 오늘날과 비슷해서 "새해에는 건강하거라", "올해는 꼭 과거에 합격해라", "좋은 혼처를 만나라"는 말이 오갔다. 조선 후기 문헌인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설날 아침 세배를 다니며 덕담을 나누는 풍경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다만 세뱃돈은 현대처럼 현금이 아니었다. 주로 엽전(동전)이나 떡, 과일, 곶감 같은 음식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건넸다. 부유한 집안에서는 새 옷(설빔)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입혔다. 설빔은 새해를 맞아 새로 장만한 옷으로, 조선시대에도 설날에 새 옷을 입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가난한 집에서는 헌옷이라도 깨끗하게 빨아 아이에게 입혔다.

설날 음식, 떡국과 세찬의 문화

설날 음식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떡국이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쓴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설날에 흰 떡국을 끓여 먹으며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기록이 있다. 흰 가래떡을 동그랗게 썰어 넣는 것은 동전처럼 둥글어 재물이 쌓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지역에 따라 굴떡국, 꿩고기 떡국 등 변형이 있었다.

세찬(歲饌)은 설날에 차려 먹는 절기 음식의 총칭이다. 식혜, 수정과, 약식, 강정, 산적 등이 준비됐다. 특히 관청이나 양반 가문에서는 연하장과 함께 떡, 고기, 술 등을 선물로 보내는 세찬 교환이 활발했다. 조선시대 세찬 교환은 지금의 설 선물 세트 문화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민간 설 풍습, 윷놀이와 연날리기

설날과 정월 대보름 사이 보름 동안은 세시풍속이 집중되는 시기였다. 윷놀이는 조선시대에도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대표 놀이였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윷점을 쳐서 한 해의 운세를 점치는 풍습도 있었다. 연날리기는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성행했다. 특히 액막이 연을 날리다 정월 대보름 전날 "액(厄)" 자를 쓰고 연줄을 끊어 날려 보내면 한 해의 액운이 물러간다고 믿었다.

널뛰기는 주로 여성들이 즐겼다. 외출이 제한됐던 여성들이 널뛰기를 하면서 담 너머를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팽이치기, 썰매 타기도 겨울 설날의 대표 놀이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 도박성 놀이인 노름도 설날에 성행해 관청에서 금지령을 내리는 일도 많았다.

신분에 따른 설날의 차이

조선은 엄격한 신분 사회였다. 설날을 맞이하는 모습도 신분에 따라 크게 달랐다. 양반 가문에서는 차례, 성묘, 세배, 손님 접대가 이어지는 바쁜 하루였다. 반면 노비나 하층민에게 설날은 쉬는 날이기도 했지만, 주인집의 제사 준비와 손님 접대를 위해 오히려 더 바쁜 날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노비들은 설날에 주인에게 선물을 바치는 관례도 있었다.

상인들에게 설날은 외상 결제 정산일이기도 했다. 연말에 밀린 외상을 설날 전에 갚는 것이 상거래 관행이었다. 갚지 못한 사람들은 빚쟁이를 피해 설날 밤새 도망 다니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조선 후기 문헌에 남아 있다. 조선시대 설날에도 빚과 이자 문제가 서민들의 큰 골칫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FAQ

Q. 조선시대에도 음력 설과 양력 설이 나뉘어 있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음력만 사용했기 때문에 음력과 양력의 구분이 없었다.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삼게 된 것은 1896년 고종이 태양력을 공식 채택하면서부터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양력 설(신정)이 강요되면서 음력 설이 억압됐다가, 1989년부터 음력 설이 공식적으로 '설날'로 지정되고 연휴가 생겼다.

Q. 조선시대 세배는 지금과 같은 방식이었나요?

기본 형식은 비슷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큰절을 올리고, 윗사람이 덕담으로 답하는 방식이다. 다만 유교 예법에 따른 절 방식(남녀 절 방향, 손 위치 등)은 현대보다 더 엄격하게 규정돼 있었다. 남자는 왼손이 위, 여자는 오른손이 위라는 구분도 이 시기에 정립됐다.

Q. 조선시대 설날에도 윷놀이를 했나요?

그렇다. 윷놀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내려온 오랜 놀이로, 조선시대 설날과 정월에 가장 널리 즐기던 놀이였다. 동국세시기에는 설날 윷놀이로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풍습도 기록돼 있다. 마을 단위로 팀을 나눠 내기 윷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Q. 조선시대 설날 음식에서 지금과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가장 큰 차이는 설날 음식의 지역성이다. 지금은 전국 어디서나 비슷한 음식을 먹지만, 조선시대에는 지역 산물에 따라 설날 음식이 크게 달랐다. 북부 지방은 만두를 즐겼고, 남부 지방은 굴이나 해산물을 활용한 떡국을 먹었다. 궁중 음식과 민간 음식의 격차도 지금보다 훨씬 컸다.

Q. 조선시대에도 설 선물을 주고받는 문화가 있었나요?

있었다. 세찬(歲饌)이라 하여 설날 음식과 물품을 선물로 주고받는 문화가 있었다. 특히 관직 사회에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세찬을 바치는 관행이 있었고, 이것이 과도해지면 부담이 됐다. 조선시대 실록에는 지나친 세찬 관행을 금지하라는 왕명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등 역사 문헌을 참고해 작성됐습니다. 조선시대 풍속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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