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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시험 부정행위 실태, 커닝부터 대리시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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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과거 시험은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식 통로였습니다. 합격 한 장이 가문의 영광을 바꿀 수 있었으니, 부정행위에 대한 유혹도 그만큼 강렬했습니다. 실록을 비롯한 당대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500년 내내 각종 부정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험 부정행위를 생각하면 놀랍도록 닮은 수법들이 등장합니다.

과거 시험의 구조와 그 중요성

조선의 과거 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고, 그중 문과가 가장 권위 있었습니다. 문과는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향시), 한양에서 치르는 복시(회시), 국왕 앞에서의 전시로 단계가 나뉘었습니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 외에 국가 경사나 왕의 명령으로 여는 별시, 증광시 등도 있었습니다.

문과 최종 합격자는 보통 33명에 불과했습니다. 응시자 수가 많을 때는 수천 명에 달했으니 경쟁률이 수백 대 일이었습니다. 합격하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고 토지와 녹봉이 주어졌으며, 가문 전체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부정행위의 유혹이 얼마나 컸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협서 — 조선판 커닝 페이퍼의 세계

가장 널리 쓰인 수법은 협서(挾書)였습니다. 경전 내용이나 예상 답안을 작은 종이, 천 조각, 심지어 손바닥에 적어 숨겨 들어가는 방식이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수법이 정교해졌습니다. 붓대 속에 얇은 종이를 말아 넣거나, 먹통 바닥에 숨기거나, 옷감 자체에 글씨를 빽빽이 새기는 방법이 동원됐습니다. 심지어 시험장에 들고 가는 음식인 답례품의 떡 안에 종이를 넣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적발될 경우의 처벌은 무거웠습니다. 시험 자격 박탈은 물론이고, 장(杖) 80대를 맞는 형벌이 법전에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실록에는 매 시험마다 협서 적발 사례가 등장합니다. 1546년(명종 1년) 실록에는 시험관이 수험생 수십 명에게서 협서를 발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차술과 대작 — 대리 시험의 원조

차술(借述)은 다른 사람의 글을 빌려 쓴다는 뜻으로, 오늘날의 대리 시험에 해당합니다. 실력이 부족한 양반 자제가 글 잘 쓰는 서얼이나 중인에게 금품을 주고 대신 시험을 치르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식년시처럼 규모 큰 시험은 수험생이 수천 명에 달했기 때문에 감독관이 일일이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조정에서는 수험생 얼굴과 명단을 대조하는 조면(照面) 절차를 두었지만,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형제나 친척 중 외모가 비슷한 사람을 동원하는 사례도 있었고, 감독관에게 뇌물을 건네 눈을 감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1610년(광해군 2년) 실록에는 대리 시험 주모자를 엄히 처벌하라는 왕명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에도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관 매수 — 출제자와 채점관을 공략하다

시관(試官), 즉 출제 및 채점을 담당하는 관리를 매수하는 것은 가장 고차원의 부정행위였습니다. 출제 예상 범위를 사전에 흘려받거나, 답안 채점 과정에서 특정 수험생의 답안을 우대해 달라는 청탁이 이루어졌습니다. 권세 있는 집안에서는 시험관 선발 단계부터 인맥을 활용해 자기 사람을 끼워 넣으려 했습니다.

이런 비리를 막기 위해 조정은 답안지의 수험생 이름을 가리는 봉미(封彌) 제도와, 답안을 다른 사람이 다시 베껴쓰는 등록(謄錄) 절차를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채점관에게 특정 표식을 쓰는 방법을 사전에 약속하는 수법으로 우회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장원 위조와 답안 바꿔치기

더 대담한 부정으로는 답안지 자체를 교체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뒤 채점 과정에서 권세가 집안의 답안을 좋은 답안과 바꿔치기하거나, 아예 다른 사람의 답안을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시험관들의 공모 없이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적발될 경우 관련된 관리들도 함께 처벌받았습니다.

1519년(중종 14년) 기묘사화 직전 과거 부정 사건은 당대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답안지 교체 의혹이 제기되어 조사가 이루어졌고, 일부 급제자의 자격이 박탈되었습니다.

향시와 회시 사이의 틈새 부정

지방에서 치르는 향시는 감독이 상대적으로 느슨했기 때문에 부정이 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지방 수령이 부정행위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적극 개입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향시 합격증을 위조하거나 사고파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한양 회시에 오면 감독이 더 엄격해지지만, 향시 단계에서 이미 걸러진 인원이 올라오는 구조였기 때문에 향시 부정은 치명적인 허점이었습니다.

조정은 주기적으로 엄단 방침을 발표했지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부정을 완전히 근절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과거 합격이 가져오는 이익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과거 부정의 제도화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과거 부정이 거의 관행화되는 양상이 나타납니다. 세도 정치 시대에는 합격 자체가 인맥과 금품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1800년대 들어 과거 시험장의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수험생이 수만 명에 이르는 시험장에서 답안을 대신 써주는 거간꾼이 활개쳤고, 감독관들은 이를 묵과하거나 뇌물을 받고 눈을 감았습니다.

결국 갑오개혁(1894년)으로 과거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습니다. 500년 역사를 가진 제도의 종말이었습니다. 그 끝에는 부정행위로 인한 신뢰 붕괴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습니다. 실력이 아닌 인맥과 돈으로 관료가 결정되는 구조는 국가 행정력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고, 이는 조선 말기 국가 위기의 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FAQ

Q. 협서가 적발되면 어떤 처벌을 받았나요?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르면 협서 적발 시 시험 자격을 박탈하고 장 80대의 태형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재응시 금지 기간을 두거나 유배를 보내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단, 실제 처벌 수위는 당사자의 신분과 당시 정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Q. 봉미 제도란 무엇인가요?

봉미(封彌)는 채점 과정에서 수험생의 이름을 풀로 봉하여 가리는 제도입니다. 채점관이 수험생의 신원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안만 보고 평가하도록 함으로써 청탁이나 편향을 방지하려 했습니다. 중국 송나라의 제도를 도입한 것으로,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었습니다.

Q. 대리 시험 주모자가 잡히면 어떻게 되었나요?

대리 시험, 즉 차술은 협서보다 중한 부정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주모자와 대리 응시자 모두 처벌 대상이었으며, 과거 응시 자격 박탈과 유배가 함께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시험관이 공모한 경우에는 파직 및 형벌이 뒤따랐습니다.

Q. 여성도 과거 부정행위에 관여했나요?

여성은 과거 응시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나 남편의 합격을 위해 뇌물을 마련하거나 청탁 관계를 주선하는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부 사대부 가문 여성들이 시험관의 부인에게 접근해 청탁을 넣은 사례도 있었습니다.

Q. 과거 부정행위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인가요?

만연한 부정행위는 실력 있는 인재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부유층이나 권세가 집안 출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구조를 강화했습니다. 이는 관료제의 질적 저하로 이어졌고, 민심 이반과 국가 경쟁력 약화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폐해는 이러한 구조적 부패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조선 과거 시험의 부정행위 역사는 단순히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정한 선발 제도가 얼마나 어렵고, 그것이 무너졌을 때 사회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500년 전의 이야기가 지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 이 글은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서술되었으며, 학문적 연구를 위해서는 조선왕조실록 등 1차 사료를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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